
갑자기 무생채가 먹고 싶어 무를 꺼내 자르다가 상념에 잠겼습니다. 막상 저지르고 보니 하기 귀찮아져서 그런 건 아닙니다
동그란 영(0)의 모습을 한 무(無)라니… 너무나도 단편적인 사색이지만 간만에 멍하니 맘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죠. 실은 조금 귀찮기도 해서 결국 자른 무는 생채 대신 라면에 넣어 시원하게 먹었습니다

유럽 최대 음악 축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는 'Nul Points(널 포인트)'라 불리는 저주가 있습니다. 참가국 어디에서도 단 1점의 표도 받지 못하는 0점, 무득표의 굴욕이죠. 1962년 벨기에가 처음 이 불명예를 떠안은 이래 본선 무대에서 37곡에 0점의 낙인이 찍혔습니다.
단연 '0점의 제왕'은 노르웨이인데 역대 본선 꼴찌 12회, 널 포인트 4회로 오스트리아와 함께 공동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죠. 그중에서도 1978년 파리 대회, 얀 타이겐(Jahn Teigen)이 부른 'Mil etter mil(끝없는 길)'은 전설입니다.
현행 12점 투표 시스템 도입 이후 최초의 완벽한 0점이었던 이 곡은 귀국 직후 노르웨이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약 20주간 차트에 머물렀죠. 같은 해 발매된 앨범 제목은 아예 'This Year's Loser(올해의 패배자)'로 타이겐은 이후 유로비전에 두 번 더 출전해 1983년에는 9위까지 올랐습니다.
2004년 베스트 앨범 제목은 'Fra null til gull(0에서 금으로)'이었다니 이쯤이면 셀 수 있는 다른 숫자보다 오히려 값진 0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0에서 태어난 0
숫자 0의 고향은 인도입니다. 1에서 9까지의 숫자가 먼저 존재했고, 0은 한참 뒤에야 등장했죠.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공(空)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로마 숫자 체계에는 0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7세기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가 이 침묵을 깨뜨렸죠. 628년 저서 '브라마스푸타싯단타'에서 그는 역사상 처음 0을 독립된 수로 정의했습니다. '같은 두 수를 빼서 얻는 수'. 이어서 0의 사칙연산 규칙까지 정리했고요. 0으로 나누는 문제에 대한 사유는 후대에 '무한'의 개념이 됐으니 '없음'과 '무한'이 같은 토양에서 싹을 틔운 셈입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0을 뜻하는 '순야(śūnya)'는 '비어 있다'는 뜻이고, 불교의 '공(空)'을 가리키는 '순야타(śūnyatā)'는 바로 이 순야에서 파생된 단어죠. 수학의 0과 불교의 공이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인도 문명 안에서 '없음'에 대한 사유가 수학과 철학, 동시에 두 갈래 꽃을 피운 것이죠.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있음과 없음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선언이 바로 그 철학적 결실이 됐네요.
비움이 스타일이 된 시대…다시 0으로
선(禪), 영어로 Zen. 21세기 전 세계 디자인과 라이프스타일의 키워드죠. 인테리어에서 '젠 스타일'이라 불리는 흐름의 정체는 동양의 선 사상과 서양의 미니멀리즘이 만난 결과물입니다. 장식을 걷어내고 여백을 살리면서 비어 있는 공간 자체를 미학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고요.
이 흐름은 20세기 후반 일본 디자인에서 먼저 결실을 맺었습니다. 무인양품으로 알려진 무지(MUJI)의 철학이 대표적입니다. 브랜드명 자체가 '무인양품(無印良品)', 즉 '표시가 없는 좋은 물건'으로 로고와 장식이 없는 데다가 색도 최소화하는 전략을 택해 없앰으로써 본질만 남긴다는 취지를 살린 거죠.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노출 콘크리트 벽면에 빛 한 줄기만으로 공간을 완성한 것도, 스티브 잡스가 애플 제품에서 버튼 하나까지 덜어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으로 완성에 이른다는 이 역설은 올해 색 하나에 담기기도 했죠. 글로벌 색상 전문 연구·개발 기업 팬톤이 2026년 컬러로 선정한 '클라우드 댄서(Cloud Dancer)'.
1999년 선정 시작 이래 팬톤 역사상 최초로 화이트 계열을 선택하며 '고요한 성찰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사회의 상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혼란의 시대에 더함이 아니라 덜어냄으로 균형을 찾는다는 시대정신의 발로라고 볼 수 있겠네요.
다시 초반부로 돌아가면 노르웨이는 역대 최다 꼴찌 국가이면서 동시에 우승 3회. 알렉산데르 뤼바크(Alexander Rybak)는 2009년 'Fairytale'로 당시 역대 최고점인 387점을 기록했습니다. 꼴찌의 역사로 우승의 역사를 만든 거죠.
브라마굽타가 정의한 0의 핵심은, 텅 빈 자리가 있어야 자릿값이 생기고 무한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죠. 비어 있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이슈에디코 정금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