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하나가 수천억원에 팔렸다는 기사가 나면 사람들은 으레 '새 건물주가 누구냐'부터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막상 등기부등본을 떼 보면 소유자 칸에는 낯선 '○○신탁' 같은 이름이 적힌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신탁회사가 그 비싼 건물을 산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신탁회사가 자기 돈으로 산 건 아닙니다. 부동산펀드가 투자한 빌딩이라면 등기부에 신탁사 이름이 올라 있는 경우가 있는데요. 법률상 소유권을 보유하는 주체와 투자 수익을 가져가는 주체가 다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실제 투자자와 자금의 출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명단 어딘가에 매달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우리 돈도 끼어 있고요. 이해를 돕기 위해 1000억 원짜리 가상 빌딩을 하나 세우겠습니다. 아래 금액과 비율은 구조를 보여주기 위한 가정인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신탁'은 금고지기 역할 동네 계모임을 떠올리면 구조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계원들이 돈을 모으고 계주가 그 돈을 굴리는데, 계주가 곗돈을 들고 사라지는 사고가 종종 뉴스에 등장하죠. 이런 일을 막으려면 곗돈 통장을 계주 이름이 아닌, 믿을 만한 제3자에게 맡겨두면 되는데요. 신탁형 부동산펀드는 보통 이런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원 자리에는 돈을 댄 투자자가, 계주 자리에는 돈을 굴리는 자산운용사가 앉죠. 곗돈 통장을 맡는 제3자가 신탁사입니다. 운용사가 사고팔 결정을 내려도 펀드 재산은 운용사 재산과 섞이지 않도록 신탁사 명의로 따로 보관하는데요. 등기부에 신탁사 이름이 오르는 이유이고요. 그래서 빌딩이 팔려도 1층 풍경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입주사와의 임대차계약은 새 주인에게 그대로 넘어가는 게 일반적인 데다, 청소·경비·설비 같은 현장 일은 원래 관리 전문회사가 맡고 있었으니까요. 바뀐 건 계원 명단과 계주 정도인 셈이죠. 계주가 딴마음을 품으면 계주인 운용사가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살 건물을 고르고 가격을 흥정한 다음 들어와 있는 입주사를 살피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오죠. 산 뒤에는 낡은 설비를 고치고 임대차계약을 갱신하다가 적당한 때 팔 시점까지 정합니다. 그 대가로 계약에서 정한 보수를 받는데요. 1000억 원짜리 건물을 굴린다고 운용사 매출이 1000억 원이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문제는 계원들이 계주의 일을 하나하나 지켜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친구 두 명이 같은 날 한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고 해볼까요. 한 명은 "내 중고폰 좀 팔아줘"라고 요청했고 다른 한 명은 "중고폰 하나 사다 줘"라는 부탁을 요청했습니다. 부탁받은 친구가 두 사람을 연결해 주면 일은 쉽게 끝나지만, 값을 정하는 건 그들이죠. 파는 친구는 비싸게, 사는 친구는 싸게 받고 싶을 텐데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요? 이처럼 대신 일해주는 사람의 처지 때문에 맡긴 사람들의 이익이 엇갈리는 상황을 이해상충이라고 부릅니다. 부동산에서는 한 운용사가 자기가 굴리는 펀드 A의 건물을 역시 자기가 굴리는 펀드 B에 팔 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죠. 그래서 운용사는 관련 법령에 따라 투자자 이익을 보호하고 이해상충을 관리할 의무를 집니다. 전문가답게 신중히 판단할 의무(선관주의의무)와 자기 이익보다 투자자 이익을 앞세울 의무(충실의무)죠. 진짜 주인 명단엔 '내 월급'도 있다 그럼 계원은 누굴까요. 1000억 원짜리 빌딩에서 투자자들이 직접 낸 돈이 500억 원이라고 가정해 쪼개 보겠습니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연기금)이 200억 원, 보험사가 150억 원, 공제회가 100억 원을 냈다고 보죠. 남은 50억 원은 계주인 운용사가 자기 돈으로 함께 투자한다고 가정할 경우, 실제 운용사의 공동투자 여부와 비율은 펀드마다 다릅니다. 이 이름들을 월급명세서 옆에 놓아 보면 낯설지 않습니다. 연기금과 보험사, 공제회는 가입자에게 지급할 연금·보험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는데요. 그 투자 대상에 부동산펀드가 포함될 수 있고, 펀드가 빌딩에 투자하면 그 자금의 일부가 부동산으로 흘러가는 것이죠 이들이 빌딩을 좋아하는 이유는 돈의 '유통기한'에 있습니다. 연금과 보험금은 수십 년 뒤 가입자에게 돌려줄 돈이라 당장 꺼내 쓸 일이 없는데요. 빌딩은 주식처럼 오늘 사서 내일 팔기 어렵지만 임대료가 꾸준히 들어오기 때문에 오래 묵혀도 되는 돈을 묶는 데 좋습니다. 결국 '빌딩 매각' 기사 속 계원 명단을 끝까지 따라가면 그 끝에 내 월급명세서의 한 줄이 닿아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절반은 빚…갭투자와 닮은꼴 그런데 빌딩값을 계원들 돈으로만 치르지는 않습니다. 앞서 예시를 든 빌딩도 투자자 돈 500억 원에 대출 500억 원을 얹어 샀죠. 전세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와 뼈대가 같습니다. 빚을 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빌딩이 임대료에서 운영비를 빼고 1년에 50억 원(순영업소득, NOI)을 번다고 해보죠. 대출 500억 원의 이자가 연 4%일 경우 20억 원인데요. 반면 이자를 내고 남은 30억 원을 내 돈 500억 원으로 나누면 수익률은 6%가 됩니다. 빚 없이 1000억 원을 다 내고 샀다면 5%에 그쳤을 겁니다. 다만 이는 세금과 각종 비용 등을 제외한 단순 계산입니다. 이 지렛대는 반대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금리가 4%에서 6%로 오르면 이자는 30억 원으로 늘어나고 손에 남는 돈은 20억 원까지 줄죠. 건물값도 흔들립니다. 상가 분양 광고에서 '연 수익률 6% 보장' 같은 문구를 본 적 있으실 텐데요. 수익형 부동산은 이렇게 '1년에 몸값의 몇 %를 버느냐'로 가격이 매겨집니다. 이 비율을 자본환원율(Cap Rate)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더해 금리가 오르면 사는 사람들도 눈높이를 올립니다. '예금 이자가 이만큼인데 5%로는 안 사겠다, 6%는 돼야 한다'는 식인데요. 그러면 1년에 50억 원을 버는 건물의 몸값은 1000억 원에서 약 833억원으로 내려갑니다. 건물이 버는 돈은 그대로인데 가격만 17% 꺼지는 셈이죠. 갭투자에서 집값이 떨어져도 세입자에게 돌려줄 전세금은 그대로입니다. 똑같이 몸값이 낮아져도 은행에 돌려줄 돈 500억 원은 그대로죠. 때문에 투자자 몫은 500억 원에서 약 333억 원으로 3분의 1이 사라집니다. 돈을 빌려준 은행도 이걸 잘 아는데요. 그래서 대출계약에 경고등을 두 개 달아둡니다. 하나는 주택담보대출(주담대) 때 듣던 LTV, 즉 건물값 대비 대출 비율인데요. 다른 하나는 DSCR로 건물이 벌어들이는 순영업소득이 대출 원리금 상환액의 몇 배인지를 보여주는 지표인데요. 대출계약에서 정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추가 담보나 상환, 대출 조건 조정 등을 놓고 은행과 협의해야 할 수 있습니다. 연료가 바닥나 차가 서기 전에 주유 경고등을 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대로 대출 만기를 맞으면 새 대출로 갈아타기(리파이낸싱)도 어려워지고요. 건물주가 임대료를 잘 안 깎는 이유 공실이 늘어도 오피스 임대료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본 대로 건물값은 임대료로 매겨지거든요. 계약서상 임대료를 깎으면 그 숫자가 곧바로 건물 몸값과 다음 입주사와의 협상에 반영됩니다. 그래서 건물주들은 임대료는 그대로 두고 다른 걸 얹어주는데요. '처음 몇 달은 무료(렌트프리)'나 '인테리어 공사비 지원(TI)' 같은 식이죠. 헬스장이 월 10만 원 정가는 지키면서 '12개월 등록하면 3개월 무료'를 내거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장 보고서가 계약서에 적힌 명목임대료와 이런 혜택을 반영한 실질임대료를 따로 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명목임대료만 보면 시장이 버티는 것 같아도 실질임대료는 이미 내려가고 있는 거죠. 요즘 시장은 어떨까요?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는 "명목임대료가 오르더라도 렌트프리나 TI 지원이 커지면 실질임대료 상승 폭은 제한될 수 있다"며 두 지표를 함께 봐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서울 오피스 시장에서 신규 공급이 늘어나며 입주사 유치 경쟁이 붙으면서 일부 빌딩을 중심으로 렌트프리와 같은 혜택이 커지는 추세라고 부연하네요. 다만 권역과 건물마다 사정이 달라 시장 전체에서 일제히 늘었다 보기는 어렵고 우량 오피스는 여전히 건물주에게 유리한 조건을 유지한다는 말도 보탰습니다. 정가는 그대로인데 '보너스 개월 수'를 늘리는 헬스장이 동네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팔린 날은 '계 깨는 날' 몇 년 뒤 그 빌딩이 다시 매물로 나오면 운용사가 어려워졌다는 뜻일까요? 업계의 시각은 다릅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펀드 만기, 가치 상승에 따른 차익 실현, 포트폴리오 조정 등 매각 배경은 다양하다며 "매각 자체를 운용사 경영난과 연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는데요. 부동산펀드는 처음부터 만기를 정해두고 출발하는 경우가 대다수라서 매각은 예정된 '계 깨는 날'에 가깝다는 얘기입니다. 다만 만기 전이라도 투자 전략이나 시장 상황에 따라 건물을 팔 수 있고, 반대로 만기가 다가와도 매각 시점이 조정될 수 있고요. 이 관계자는 매각 여부보다 처음 세운 전략대로 자산을 어떻게 굴렸고 투자자에게 어떤 성과를 돌려줬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곗돈을 나눌 때도 순서가 있는데요. 1000억 원짜리 빌딩을 1100억 원에 팔았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매각대금에서 대출금과 매각 관련 비용 등을 먼저 정산하고 남은 돈을 투자자에게 분배합니다. 투자 원금을 돌려주고도 돈이 남는다면 그중 약정에 따라 배분되는 몫이 투자 이익이 되죠. 돈을 받는 줄은 대출 안에서도 다시 나뉩니다. 이 줄의 칸 하나하나를 트랜치(tranche)라고 부르는데요. 샴페인 타워를 떠올리면 쉽습니다. 술은 맨 위 잔부터 채워지고, 넘쳐야 아랫잔으로 흘러가죠. 돈도 마찬가지로 먼저 받는 선순위부터 채워진 다음 후순위, 마지막으로 지분 투자자 차례가 옵니다. 손실은 반대로 홍수처럼 맨 아래부터 차오르고요. 앞서 받은 대출 500억 원을 선순위 400억 원과 후순위 100억 원으로 나눌까요? 만약 빌딩이 450억 원에 팔리면 선순위는 400억 원을 다 받고 후순위는 50억 원만 건질 수 있습니다. 지분 투자자는 한 푼도 못 받고요. 먼저 받는 자리는 안전한 대신 이자가 낮고 나중 자리는 위험한 만큼 이자가 높은 이유인데요. 다만 후순위도 어디까지나 빌려준 돈이지 지분은 아닙니다. 성적을 매길 때는 CoC와 IRR이라는 두 가지 숫자를 많이 보는데요. CoC는 투자한 자기자본 대비 연간 현금수익의 비율이고, IRR은 투자금의 유입·유출 시점까지 고려해 계산한 연환산 수익률입니다. 같은 금액을 벌더라도 3년 만에 회수한 투자와 10년 만에 회수한 투자는 IRR이 달라지고요. 그럼 업계는 어느 성적표를 더 볼까요? 이지스자산운용 관계자는 "투자심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체 투자수익성을 판단할 수 있는 IRR을 주요 지표로 활용한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투자자 성격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는데요. 꼬박꼬박 배당을 받고 싶은 투자자는 CoC, 팔 때 남길 차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투자자는IRR을 상대적으로 더 따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네요. 물론 실제 판단에서는 어느 하나만 보지 않고 투자 위험과 현금흐름의 안정성까지 함께 따진다고 합니다. 중도에 돈을 빼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입니다. 빌딩은 주식처럼 필요한 만큼 잘라 팔 수 없거든요. 계원 몇이 한꺼번에 돈을 돌려달라고 하면 건물을 헐값에 넘겨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입은 피해는 남은 계원들이 떠안게 됩니다. 계모임이 오래가는 비결은 결국 순서와 장부라고들 하죠. 누가 먼저 곗돈을 타는지 정해두고 그 돈이 어디 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으면 계주가 딴마음을 품기 어렵습니다. 수천억 원짜리 빌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곗돈을 따로 맡아두는 신탁회사, 받을 순서를 미리 정한 트랜치, 운용사에 지운 법적 의무는 모두 남의 돈이 섞인 거래에서 순서와 장부를 지키기 위한 장치인 셈이죠. /이슈에디코 김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