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현재,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중동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국제 에너지 시장이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란이 서방 및 이스라엘 관련 선박의 통과를 제한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통항이 급감해 전 세계 해상 원유 거래에 위험부담이 점증했죠.
사우디아라비아는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건설한 동서 원유 파이프라인 '페트로라인'을 40여 년 만에 전체 가동해 페르시아만 아브카이크에서 홍해 연안 얀부 항구로 원유를 돌리고 있지만 호르무즈를 거치던 하루 약 2000만 배럴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여파는 동남아까지 직격해 역대 최대 폭의 유류 가격 인상이 발생한 필리핀 하원은 이달 16일 대통령에게 석유류 개별소비세 감면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죠. 동시에 중국과의 해상 충돌이 반복되는 가운데 필리핀군 점령 티투(Thitu) 섬 상공에서 휴대전화에 'Welcome to CHINA' 로밍 메시지가 뜨는 일까지 지난달 23일 로이터 통신(Reuters)을 통해 보도됐고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와중에 여러모로 고충을 겪는 두 나라(따지고 보면 요즘 고충을 겪지 않는 나라를 찾는 게 더 힘들겠네요)에 다른 공통점도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디'는 아라비아반도 중부 디리야의 유력 가문 알 사우드(Al Saud) 왕가에서 가져왔죠. 이 가문 이름의 근원은 사우드 이븐 무함마드 이븐 무크린입니다.
그의 아들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1727년 디리야 토후국을 세우고 와하비즘 창시자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 와하브와 동맹을 맺으면서 왕조의 기틀을 잡았죠. 아랍어에서 '알(Āl)'은 '~의 가문'을 의미하니 사우디아라비아를 직역하면 '사우드 가문의 아라비아'가 됩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필리핀 역시 특정 인물에게서 국명이 비롯됐죠. 1543년 스페인 탐험가 루이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혹은 그의 부관 베르나르도 데 라 토레)가 레이테와 사마르 두 섬에 '라스 이슬라스 펠리피나스(Las Islas Felipinas)'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스페인어로 '펠리페에게 속한 섬들'이라는 뜻이고요. 당시 펠리페 2세는 왕이 아닌 열여섯 살 아스투리아스 왕세자였습니다. 이후 300여 년 식민 지배를 거치며 펠리피나스가 군도 전체를 아우르게 됐고, 독립 이후에도 철자 변화는 있었지만 이 이름은 유지됐습니다. 사우디와 필리핀 외에도 세계 지도에는 인명이 국경의 윤곽을 규정하는 사례가 적지 않죠.

탐험과 발견의 이름
'아메리카'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인명 국호입니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가 도달한 땅이 아시아가 아니라 신대륙임을 처음 주장한 인물이죠. 1507년 독일의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지도에 남아메리카 대륙을 'America'로 표기하면서 이 이름이 정착했답니다.
콜럼버스가 대륙에 먼저 도달했지만 땅의 정체를 파악한 사람의 이름이 붙으며 발견보다 인식이 더 강하게 명명권을 행사한 사례가 됐죠. 콜럼버스 본인의 이름은 콜롬비아에 남았지만요.
태평양과 인도양의 작은 섬 국가들에도 탐험가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마셜제도는 1788년 이 군도를 항해한 영국 선장 존 마셜, 세이셸은 1756년 이 섬을 프랑스령으로 선포할 당시의 재무장관 장 모로 드 세이셸에서 유래했죠.
모리셔스는 1598년 네덜란드 선단이 당시 오라녜공 마우리츠 반 나사우의 이름을 차용했습니다. 키리바시의 국명은 영국 탐험가 토머스 길버트의 성 'Gilbert'를 현지 길버트어로 발음한 결과인데, 길버트어에는 s 음가가 없어 's'가 'si'로 바뀌고 'l'이 빠지면서 Kiribati(키리바시)가 됐다네요.
왕조와 통치자의 이름
한 가문이나 통치자의 이름이 곧 국명이 된 사례도 있습니다. 리히텐슈타인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귀족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1699년과 1712년에 영지를 사들이고 1719년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공국 지위를 인정받으며 탄생했습니다.
독일어로 '밝은 돌'이라는 의미의 '리히텐슈타인'은 가문의 본성인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성에서 가져왔죠.
에스와티니는 19세기 음스와티 2세에게서 나왔습니다. 현재 영토의 두 배까지 왕국을 확장한 인물인 만큼 스와지족이 '역대 가장 위대한 전투왕'으로 기억한다죠.
영국 식민지 시대에는 영어-스와지어 혼합명 '스와질랜드'를 썼지만, 2018년 음스와티 3세가 독립 50주년을 기리면서 스와지어 본래 이름인 '에스와티니(eSwatini, 스와지족의 땅)'로 되돌렸습니다.
인명 유래 국호 중 가장 오래된 아제르바이잔은 기원전 4세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메디아 총독 아트로파테스(Atropates)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에서도 자치권을 지킨 '아트로파테네' 왕국이 기원입니다. 2300여 년에 걸쳐 명칭이 변형되며 아제르바이잔이 됐고요.
해방과 신앙의 이름
볼리비아는 남미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과 직결합니다. 볼리바르 본인은 개인의 이름이 국호가 되는 것이 공화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꺼렸지만, 1825년 독립 당시 국민적 지지가 이어지자 결국 수용했죠.
카리브해에는 종교적 인물의 이름이 밀집해 있습니다. 엘살바도르(구세주 예수), 세인트키츠네비스(성 크리스토퍼), 세인트루시아(성녀 루치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성 빈첸시오), 도미니카 공화국(성 도미니코). 산마리노는 4세기 달마티아 출신 석공 마리누스가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피해 티타노 산에 세운 공동체에서 유래했죠.
조지아라는 영어 국명은 성 게오르기우스(성 조지)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정작 조지아인들은 자국을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 부르는데, 이 이름은 동부 지방 '카르틀리'에서 왔습니다. 영어 국명과 자국어 국명의 어원이 완전히 다른 이중 명명의 대표 사례죠.
국명은 단순히 국토에 붙는 행정적 호칭이 아니라 역사에 따르는 이름입니다. 사우드 가문은 300년 왕조의 인장이고, 펠리페의 이름은 300년 식민 지배의 흔적입니다. 볼리바르는 해방의 기억이며, 아제르바이잔은 자립의 신념입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대한민국, 코리아라는 국호가 세계만방에 더한 K의 힘을 발휘하길 바랍니다.
/이슈에디코 정금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