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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뷰

[수영씨 이야기] 속아주고 싶었는데 끝내 속을 수 없던 '레이디 두아'

'영화(콘텐츠)를 좋아하는 김수경의 영화(콘텐츠)·씨네필 관련 이모저모 이야기'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주의)

 

대학에서 문학 관련 수업을 한 번이라도 들어봤다면 귀에 익을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핍진성(verisimilitude)인데요. 쉽게 풀자면, 이는 얘기가 실제처럼 느껴지게끔 독자가 '이럴 수 있겠다'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출발해 소설 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았죠.

 

그런데 저는 가끔 핍진성을 따지기 전에 현실에서 내가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 얘기에 끌리곤 합니다. 특히 사기꾼들 얘기요.

 

그런 장르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리플리'부터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애나 만들기 ▲드롭아웃 ▲애플 사이다 비니거, 배우 수지의 인생작이 된 '안나'까지 이 장르라면 안 본 게 없을 정도인데요.

 

사람들이 이런 걸 왜 좋아하냐고 물으면 저는 두 가지를 꼽습니다. 첫째는 주인공들의 거짓말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결국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는 재미이고요. 둘째는 주인공이 왜 그런 범죄를 택하게 됐는지에 대한 과거 서사가 잘 그려질 때 오는 묘한 안타까움입니다. 통쾌함 반, 연민 반. 때문에 살짝 설정에 구멍이 좀 있어도 흐린 눈이 가능한 게 이 장르의 매력이죠.

 

 

그래서 제 올해 기대작 중 하나는 넷플릭스 '레이디 두아'였습니다. 지난달 공개된 이 드라마는 베일에 싸인 영국 왕실 납품 명품 브랜드 '부두아' 한국 지사장 '사라 킴'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석연치 않은 점을 포착한 형사 박무경(이준혁 扮)이 사건을 추적하고, 취조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정체불명의 여성(신혜선 扮)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내용인데요. 드라마에서 사라 킴, 목가희, 김은재 등 수많은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 여성을 여기선 그냥 배우 신혜선으로 통칭하겠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지난 2006년 국내에 실제 있었던 명품 '빈센트 앤 코' 사기극이 떠오른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유럽 왕실에서만 판매된다는 스위스산 명품 시계 브랜드가 서울 청담동에서 초호화 론칭쇼를 개최하고 연예인 홍보에 열을 올리며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 유령 브랜드라는 사실이 밝혀져 구설에 올랐던 사건이죠. 드라마 속 부두아의 모습과 꽤나 겹쳐 보이더라고요.

 

 

공개 직후부터 지금까지 악평보다 호평이 앞서는 레이디 두아. 저 역시 4화 중반까지는 정말 열심히 정주행하던 중 일시 정지를 눌렀습니다. 취조실에서 신혜선이 "지상 위 파티는 화려한데 그 아래엔 사람이 얼어 죽는 건 모르죠"라고 말하는 장면에서였는데요.

 

그저 부유한 사람과 아닌 사람들의 씁쓸한 비유라고 넘길 수 있는 말인데, 박 형사는 아무도 몰랐던 시신의 사인(死因)을 알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며 그를 긴급체포하거든요. 이전까지는 증거가 없어서 쩔쩔매다가, 이 한마디로 체포가 된다고요?

 

 

2024년 한국을 배경으로 삼은 설정 역시 계속 발목을 잡았습니다. 아무리 신혜선이 정체를 가리려 애써도 바(Bar)나 백화점을 포함한 여러 곳을 들락날락했기에 폐쇄회로(CC)TV를 이 잡듯 뒤지면 나올 텐데 말이죠. 또 사이버수사과와 협조해 부두아 론칭 파티에 참석한 수많은 인플루언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만 훑어봐도 금방 파악하지 않았을까요?

 

사라 킴을 아는 사람들이 아무도 그의 얼굴을 묘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신혜선의 자신감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라 킴의 농간으로 잘린 탓에 론칭 파티에서 행패까지 부린 부두아 전(前) 직원 우효은(정다빈 扮)은 경찰 전화 한 통이면 바로 달려와 사라 킴의 정체를 밝혀줄 텐데 말이죠.

 

이 시대에 부두아가 대흥행이라는 설정도 그렇습니다. 영국 왕실 납품 명품이 한국에서 유행한다면 벌써 유튜브를 타고 영국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진위를 따지는 영상이 올라오고 기자들 취재가 들어갔을 겁니다.

 

CCTV가 많지 않고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던 2000년대 초반이었다면 이해했을 텐데, 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려 했다면 설정을 조금 더 촘촘하게 다져야 했다는 게 제 사견이고요.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이런 사기극 장르에서 '이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에 대한 서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드롭아웃'입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홈즈(아만다 사이드프리드 扮)는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피 몇 방울로 수백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키트를 만들겠다는 믿음, 그 하나로 모든 걸 걸었던 사람이었죠.

 

문제는 그 믿음이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그가 선택한 방향이었습니다.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거짓말로 메우기 시작했고, 그 거짓말이 점점 커지면서 결국 수백만 명의 건강을 담보 삼은 사기극이 됐습니다. 시청자가 그를 미워하면서도 완전히 돌아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처음 품었던 열망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드라마가 끝까지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애플 사이다 비니거의 벨 깁슨 ▲안나의 이유미 ▲애나 만들기의 애나 델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르는 달라도 이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공들인 건 사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거기까지 흘러갔는지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두아에서는 신혜선이 이렇게까지 명품에 집착하게 된 이유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두아로 본격적인 사기극을 벌이기 전, 목가희라는 가명을 쓰면서까지 백화점 명품관에 '반드시' 취직해야 했던 계기가 마지막까지 불분명했거든요. 얼핏 지독하게 가난했던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서였겠다 싶지만, 그것만으로는 명품에 그토록 깊이 빠지게 된 까닭을 납득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결국 처음 얘기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장르의 핍진성은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됐는지'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서사가 탄탄하면 나머지 구멍들은 살짝 눈감아줄 수 있습니다.

 

레이디 두아는 신혜선의 연기로 많은 것을 메웠지만, 그 한 가지만큼은 끝내 채우지 못했죠. 잘 만든 사기극은 보는 사람도 같이 속아주고 싶게 만드는 법인데, 조금만 더 치밀했더라면 저도 기꺼이 속아줬을 겁니다.

 

스토리에 속아주고 싶은데 속을 수 없다니, 드라마를 보면서 이보다 아쉬운 경우가 또 있을까요?

 

/이슈에디코 김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