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각으로 6월 12일 오전 11시,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에스타디오 아크론(Estadio Akron)에서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A조 1차전이 펼쳐집니다. 개최국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체코와 한 조에 묶인 우리나라의 첫 상대는…
공교롭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이 팀 컬러인 체코죠. 월드컵 유니폼은 피파가 양 팀 색상 충돌 여부를 선제조건으로 두고 TV 시청자 맞춤형 명도, 미디어 환경 등 여러 요소를 따져 결정합니다. 피파 경기 운영 자료를 보니 첫 경기에서는 한국이 홈 성격인 붉은색, 체코가 흰색 원정 유니폼을 입게 됐네요.
체코는 유럽 플레이오프에서 준결승과 결승전 상대인 아일랜드, 덴마크를 모두 승부차기로 꺾었습니다. 피 말리는 혈투 끝에 지난 2006년 독일 대회 이후 20년 만에 월드컵 본선 복귀를 이룬 체코가 입었던 유니폼은 모두 붉은색이었고요.
이처럼 승리의 기운이 담긴 붉은색을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에 양보하게 된 체코입니다. 스포츠에서는 색을 내어주는 일조차 건전한 경쟁의 일부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체코'라는 이름을 달고도 그 어떤 양보도 허용할 수 없던 물건이 경기장 바깥에 있었습니다.

해방군을 막던 해방의 도구
금속 앵글빔 세 개를 거싯 플레이트로 접합해 만든 대전차 장애물 '체코 고슴도치(Czech hedgehog)'의 제원은 초기형의 경우 길이 1.8m·무게 198㎏, 후기형 길이 2.1m·무게 240㎏. 어느 방향으로 넘어뜨려도 빔의 끝이 위를 향하도록 설계돼 전차가 올라타면 차체 바닥이 들려 무한궤도가 헛돌게 되죠.
어느 쪽을 봐도 가시가 솟은 모양이라 고슴도치의 이름을 차용한 이 물건의 고향은 체코슬로바키아입니다. 재작년 2월, 체코 공영방송 라디오 프라하 인터내셔널에 실린 기사를 보면 1930년대 중반 프란티셰크 카시크 소령(Major František Kašík)이 고안해 독일 전차를 막고자 국경 요새선에 약 20만 개를 설치했고요.
신생 공화국이 적대적인 이웃으로부터 국경을 지키려 만든 방어물이었으나 1938년 9월, 뮌헨협정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주데텐란트 합병을 사실상 승인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국경 지대를 넘겨준 거죠.
완성되지 못한 요새선은 고스란히 독일 손아귀에 들어갔고 20만 개의 고슴도치는 지킬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인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독일군이 연합군 상륙을 막으려 쌓은 '대서양 방벽'에 이 고슴도치가 박혀 있었죠.
목재 말뚝, 벨기에문, 테트라헤드라 등 다른 장애물과 함께 해변에 깔린 체코 고슴도치는 자국인 체코를 포함해 유럽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육지를 밟은 상륙정과 전차의 접근을 가로막는 역할을 수행하며 역사의 비극적 아이러니에 휩싸인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시간은 흘러 아이러니는 한 번 더 뒤집히죠.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흙 둑 위로 나무뿌리가 수백 년 얽힌 울타리인 내륙의 보카주(Bocage, 숲과 목초지가 혼재한 지형)를 뚫지 못해 고심하던 차에 미군 커티스 컬린 중사가 해변에 널린 독일군 장애물 중 체코 고슴도치의 강철을 잘라 셔먼 전차 앞에 용접합니다.
한 세기가 지날 무렵… 다시 전장에 놓인 고슴도치
전차 앞에 붙은 강철 톱니 모양이 코뿔소를 닮았기에 '라이노(Rhino)'라고 부른 이 전차는 생울타리를 들이받아 길을 열었죠. 효과를 본 오마 브래들리 장군(General Omar Bradley)의 대량 제작 지시로 7월 중순, 열흘 남짓한 기간에 500여 개의 절단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막으려고 세운 장애물이 막힌 길을 여는 도구로 다시 태어나며 이번엔 연합군을 돕게 된 거죠.
또다시 시간은 흐르고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자 방어에 나선 이 나라 사람들은 도면을 구해 고슴도치를 만들어 거리에 세웠습니다. 1930년대 체코가 독일 전차를 막으려 고안한 구조물을 2020년대에 러시아 전차 앞에 다시 세운 우크라이나.
지구인 수십억의 마음을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전쟁을 지양하고 평화를 바라는 정서는 결국 따스한 한 뭉텅이로 합쳐질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20년간 월드컵에서 잊혔던 체코는 승부차기 끝에 열정의 무대로 돌아왔으나 1930년대의 고슴도치는 지금도 냉정하게 가슴 돋는 능각(稜角)을 내보이며 어딘가에 서있습니다. 영원한 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무뚝뚝한 쇳덩이가 90년 가까이 몸소 증명했듯 순수한 전력이 정면 승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대결의 형태 아닐까요?
아무것도 가로막지 않은 녹색 전장에서 공을 사이에 두고 격돌하는 90분. 강철 고슴도치를 만든 나라와 붉은색을 나눈 나라가 평평한 땅 위에서 만납니다. 그 휘슬이 울릴 오는 12일 과달라하라의 잔디에는 반칙과 폭력 없이 그저 푸른 페어플레이만 함께 하길 바랍니다.
/이슈에디코 정금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