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덥습니다. 본격적인 더위는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유럽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지 걱정도 됩니다. 상공의 고기압이 마치 뚜껑처럼 열기를 가두는 열돔 현상으로 이곳 전역은 아수라장이 됐다고 하죠.
이달 26일자 기준, 영국 BBC와 미국 CNN방송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스페인에서 나흘간 213명이 더위로 목숨을 잃었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도 사망자가 잇따랐답니다. 프랑스는 본토 72개 구역에 최고 단계 적색경보를 발령했고 이탈리아는 한낮 야외 노동을 중단했습니다.
폭염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빈 등은 주말 기온이 40도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예보가 나오자 해당 국가 외에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도 비상체제에 돌입한 상황이고요. 수많은 인명피해까지 동반한 폭염이라 과거 그날 총구의 화염과 같은 긴박한 상황이 겹쳐 떠오릅니다.
1914년 오늘,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탄에 쓰러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
열아홉 살 청년이 당긴 방아쇠는 제국의 동맹세력을 차례로 끌어당겼고, 한 달여 만에 유럽은 전쟁의 포화 속에 휘말렸습니다. 4년 넘게 이어지며 군인만 900만 명 넘게 세상을 등진 1차 세계대전의 시작점이 사라예보의 6월 28일이었죠.
그리고 정확히 5년이 지난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합니다. 독일과 연합국 사이의 전쟁 상태를 공식적으로 끝낸 이 베르사유 조약이 하필 이 날짜에 맺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승전국은 전쟁의 불씨가 발화한 그날을 골라 같은 날짜에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거죠.
한 전쟁의 발화점과 종착점이 같은 숫자에 박힌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듯 31년 뒤, 아시아 대륙에도 매듭을 묶습니다.
날짜가 봉인한 또 하나의 장면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인도교. 6·25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겠다며 한강을 가로지른 다리를 폭파했습니다. 예고도 없이 굉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난 다리 위에는 피란길에 오른 시민과 후퇴하던 국군이 빼곡히 몰려 있었죠. 미군 군사고문단은 이 폭파로 최대 8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더구나 폭파 당시 서울 북쪽 외곽에 있던 북한군 전차는 일곱 시간 반이 더 지나서야 한강에 도착했죠. 인명피해를 감수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다리는 끊겼고 한강 이북에 남은 국군 주력의 퇴로마저 함께 차단됐습니다.
폭파의 책임은 명령을 따랐을 뿐인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돌아가 그해 9월 적전비행죄로 총살됐고, 12년 뒤인 1962년에야 재심이 열려 무죄 복권됐죠. 한 사람의 죽음으로 봉인된 그 새벽은 우리 전사(戰史)에 영원히 남을 오점이 됐습니다.
이 비극적인 우연으로 엮인 6월 28일의 역사적 사건들은 어찌 보면 모두 '시작'과 '끝'이 맞닿았는데요. 사라예보는 전쟁의 시작, 베르사유는 그 끝이었습니다. 한강인도교(지금 한강대교) 폭파는 남하하는 북한군의 대형을 끊어 전선을 매듭지으려는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석 달 점령의 문을 여는 시작이 됐죠.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역사는 대부분 시작과 끝을 같은 자리에 겹쳐 둡니다. 끝인 줄 알았던 날이 다른 비극의 문턱이 되고, 매듭을 지었다고 믿은 조약이 20여 년 뒤 더 큰 전쟁의 씨앗이 되는 것처럼요. 결국 베르사유의 가혹한 배상 조항은 독일의 경제 파탄을 야기했고 이 원한이 커져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모두 아시죠?
역사는 달력에 찍힌 모든 숫자들을 어쩌면 한 매듭으로 엮었을지 모릅니다. 매듭을 짓는 일과 풀리는 일은 종종 같은 날 일어나죠. 역사가 찍은 마침표가 실은 쉼표이기도 합니다.
/이슈에디코 정금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