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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뷰

[이리저리뷰] 반달의 그림자…자유롭지 못한 어린이날 노래

모레는 제103회 어린이날이죠. 어린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이들이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도록 사회 전체의 인식을 높이고자 제정한 법정 공휴일입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아이들에게도 민족정신을 심어주고자 소파 방정환을 위시해 여러 인사들이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꾸리고 이들도 독립된 인격체라는 인식을 공유하려는 목적으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죠.

 

그리고 1922년 5월1일, 소년운동단체들과 신문사가 모여 '어린이날 선언'에 이어 가두선전을 하며 어린이날의 역사적 태동을 알렸고 이듬해 5월1일, 전국적인 최초의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개최했습니다.

 

당시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 주십시오'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등의 내용이 담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어린이를 존중해달라는 메시지도 전파했고요.

 

4년의 시간이 지난 1927년, 어런이날이 노동절과 겹치자 5월 첫째 일요일로 날짜를 옮겼다가 점차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1939년부터 행사가 중단됐습니다. 이후 1945년 광복의 빛과 함께 어린이날이 부활했고 날짜도 5월5일로 확정했죠.

 

1961년 아동복지법 제정, 1975년 법정 공휴일 지정을 거쳐 2018년부터는 어린이날이 주말이나 공휴일과 겹칠 경우 대체공휴일을 적용하게 됐고요.

 

이날은 미래의 주역들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기념식, 체육대회, 글짓기 대회, 동요·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는 축제의 한마당입니다. 단순 공휴일이 아니라 어린이의 권리와 행복한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어른들의 사회적 약속을 되새기는 날인 거죠.


 어린이 대부 방정환…색동 제안한 윤극영


어린이들의 대부였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色同會)를 구성해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어린이들이 보장받을 모든 것을 감싸려고 노력했습니다.

 

1923년 3월16일 발족해 같은 해 5월1일 일본 도쿄에서 창립한 색동회는 현재 서울특별시 금천구 디지털로 121에 위치하는데요. 초대 회장인 방정환을 축 삼아 강영호, 손진태, 고한승, 정순철, 조준기, 진장섭, 정병기가 뭉쳤고 이후 윤극영, 마해송, 조재호, 정인섭 등도 합류했습니다만 이들 중 일부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는 등 친일 논란이 있어 마음이 좀 씁쓸합니다.

 

여러 색의 옷감을 잇대거나 여러 색으로 염색해 만든, 아이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소맷감인 '색동'을 단체의 명칭으로 제안한 이는 윤극영이라고 하죠. 동요작곡가이자 동화작가, 아동문화가인 윤극영은 '반달 할아버지'로 불릴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입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 반달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 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칙 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 기찻길 옆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 - 따오기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 고드름

 

모두 알 만한 정겨운 노래들이죠? 그리고 한 곡 더하자면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린이날 노래 역시 윤극영 작곡입니다.

 

1948년 만든 이 곡은 '고향 땅' '나란히' '동네 한 바퀴' '똑같아요' '새 신' '작은 별' '옹달샘' '짝짜꿍' 등 셀 수 없이 많은 곡에 가사를 붙인 불세출의 아동문학가로 '동요의 아버지'라 불리는 석동(石童) 윤석중 선생이 작사했고요.

 

4분의 2박자, 바장조 행진곡풍인 어린이날 노래는 작은악절이 마디 4개로 이뤄지는 통상의 동요들과 달리 각각 5개, 5개, 6개, 5개로 5월5일에 맞춤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음악에 진심이던 윤극영…반달처럼 반쪽인 논란


이처럼 희망찬 미래를 곡으로 표현했던 윤극영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요? 1903년 9월6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태어난 윤극영은 경성교동보통학교와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지금 경기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졸업 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음악에 뜻이 있어 중퇴 결정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음악학교, 동경예술학교,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각각 성악, 바이올린, 지휘, 화성학 등을 전공했고요.

 

색동회와 함께 1924년에는 ‘다알리아회’(달리아회)라는 동요단체를 조직해 한국 창작 동요 보급에 힘쓰며 그해 우리나라 첫 창작 동요로 꼽히는 반달을 작사·작곡했고 2년이 지나 역시 한국 최초 동요집 '반달'을 펴냈습니다.

 

광복 후 다시 찾은 나라에서는 '노래동무회' 등에서 활동하며 평생 700여 곡을 만들었고 1956년 소파상, 1970년 국민훈장 목련장 등 다수의 상훈을 받았죠. 그가 거주하며 수많은 작곡 작업을 하던 서울 강북구 소재 '윤극영 가옥'은 서울미래유산 제1호로 반달 할아버지의 숨결을 잇고 있습니다.

 

 

참혹했던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말과 정서를 담은 노래를 퍼뜨려 희망을 민족정신에 희망을 심어주던 윤극영지만 색동회에 대해 기술하면서 언급했던 친일 논란에 엮인 과거가 있는데요.

 

기독교 신학자이자 정치가·교육자·반일반공운동가·시민사회운동가인 강원용 목사는 윤극영이 만주 간도의 친일단체였던 '간도협화회(오족협화회)'에 참여한 이래 자신의 동참도 강요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단체는 1940년대 한족, 조선족, 일본인, 몽골족, 만주족 등 5개 민족의 친화를 다진다는 미명 아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미화해 선전하고 항일세력을 탄압하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이 모임 회장이 윤극영이었다는 얘기도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윤극영의 가족과 일부 연구자들은 당시 일본군정의 강압에 의해 가입했을 뿐 일제에 협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요. 실제 친일행적을 뒷받침할 문서 등의 근거는 찾기 어려워 친일 논란이 편향적이라는 일각의 지적도 있으나 일단 친일단체에 몸담았던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윤극영 본인도 회고록 등을 통해 협화회 가입이 평생의 상처와 고통이었다는 술회를 남겼죠. 어린이날을 앞둔 와중에 지금의 어린이들은 나중에 그의 창작물에 어떤 평가를 내릴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의 노래는 앞으로도 불리겠지만 그림자 같은 화음이 붙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슈에디코 전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