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 지주(지극히 주관적인) 무작위 명반 소개] 스무 번째는 2013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에서 어둠의 냉기를 발산하기 시작한 에민 굴리예프(Emin Quliyev)의 1인 프로젝트 Violet Cold(바이올렛 콜드)의 'Empire of Love'.
2015년, 바이올렛 콜드의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 프로그레시브라는 장르적 용어를 파쇄기에 넣고 잘게 다져서 검고도 몽환적인 멜로디로 다시 반죽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르 간 경계를 허무는 이질적 융합으로 경쾌한 멜랑콜리(melancholy)를 연출하는 작법은 바이올렛 콜드의 핵심이죠. 기본 토대를 애트모스페릭과 블랙 메탈로 세우고 슈게이징으로 둘러싼 사운드는 곧 '몽환'과 직결됩니다.
일렉트로닉, 트랜스, 앰비언트, 재즈, 아제르바이잔의 전통 음악 등의 요소를 활용해 장르의 굴곡을 메꾸면서 깊이와 독창성을 더하고요. 리스너의 감성을 요동치게 하고자 디프레시브 블랙 메탈의 어두운 정서를 다루며 하이 피치 스크리밍 보컬을 적절하게 구사하죠.
12년 전인 2013년 12월, 첫 싱글 발매 후 지금까지 싱글, EP, 정규를 통틀어 100개 이상의 앨범을 내놓은 다작 뮤지션 에민 굴리예프는 여기 머물지 않고 아직도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하드 씬에서 가장 주목받는 실험적인 원맨 밴드 중 하나인 바이올렛 콜드가 노래하는 사랑. 집요하게 파고들어 감정의 층위를 차곡차곡 쌓은 2021년 5월 발매작 Empire of Love는 블래스트 비트와 트레몰로 피킹이 대변하는 블랙의 테두리에서 찬란하게 부서지는 슬픔입니다.
이 앨범의 주된 장르인 블랙게이즈(Blackgaze)는 기존 블랙 메탈의 어둠에서 작은 줄기일지언정 빛을 보여주죠. 블랙 메탈과 슈게이즈가 섞인 포스트 록이자 퓨전 메탈 계열 장르로, 포악과 서정을 동시에 체감할 수 있습니다.
블랙의 블래스트 비트, 트레몰로 피킹, 스크리밍 보컬 등에 두터운 리버브·딜레이, 드론성 코드, 옅은 멜로디 등 슈게이즈 요소를 합친 장르라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주제 역시 기존 블랙의 완전한 암흑에서 벗어나 정서적으로 열린 공간감을 주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시 노이즈 월(Harsh Noise Wall), 파워 일렉트로닉스 성격의 실험작 'Neuronaut'까지 범주에 넣는다면 바이올렛 콜드가 정규 10집인 Empire of Love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사랑은 위안이나 구원이 아니라 서서히 잠식하는 감정에 가깝죠.
전통과 신스로 판을 깔아두고 안락함에 귀에 익숙해질 때쯤 날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변주처럼 청각적 공간을 남기는 연주는 반복되는 멜로디로 채우면서 밝고도 명확한 대비를 구성하죠.
듣는 내내 잔상을 남기듯 리스너의 내부를 서서히 점령하는 총 재생시간 38분 7초, 여덟 곡에 몰아넣은 복잡다단한 감정. Empire of Love의 수록곡 모두 살피면서 이번 편 마칩니다.
첫 번째 트랙 'Cradle'은 민속적 질감을 연상시키는 신스와 흩날리는 사운드로 귀를 채웁니다. 사랑의 제국에 입장하는 기분인데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년들의 단체 미드소마 파티가 떠오르네요. 앰비언트 패드 사운드가 중심을 잘 잡으면서 공간감을 짜다가 소음을 터뜨리며 요람의 평온함에 이어 찾아올 큰 감정의 전조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 곡 'Pride'는 이 앨범에서 가장 상징적인 곡으로 과감한 장조를 넣어 Deafheaven(데프헤븐)의 'Sunbather' 앨범 수록곡처럼 찬란한 분위기를 만들다가 고음역대 멜로디에 강한 디스토션을 걸어 블랙 메탈 특유의 질감을 끌어내죠. 제목 같이 오만보다는 집요함에 가까운 감정의 총체로 트레몰로 주법, 멀티 트래킹, 스크리밍은 소외된 존재들의 자긍심일 겁니다.
3번 트랙 'Be Like Magic'은 슈게이즈의 코드 진행으로 신스와 기타가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곡입니다. 반복되는 멜로디는 중독성을 띠며 마법처럼 스며드는 사랑의 덫을 떠올리게 하죠. 저음의 낭독이 뒤섞인 일렉트로닉과 메탈의 융합을 신시사이저가 주도합니다. 블래스트 비트와 신시사이저 미디(MIDI) 신호를 일치시켜 완성한 기계적 질주감이 인상적이고요.
다음 곡 'We Met During the Revolution'은 팝송으로 봐도 될 만큼 소프트한 느낌이 강합니다. 앨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구성을 가진 곡으로 외부의 억압에도 서로를 확인하는 유대감을 노래하죠. 점차 긴박해지는 리듬과 격해지는 텐션을 킥 드럼의 타격에 맞추며 같은 박동을 느끼게 합니다. 종반부의 아나테마(Anathema)틱 사운드는 귀를 절로 쫑긋거리게 만들고요.
감정의 밀도를 더 높인 다섯 번째 곡 'Shegnificant'는 정갈한 멜로디 라인과 보컬이 청각을 휘감죠. 여성(She)과 중요성(significant)이 주제인 것처럼 그들의 고통에 주목하며 선명하고도 뚜렷한 지점을 짚습니다. 블랙보다는 슈게이즈 정취로 기타 연주 뒤편에 여성의 차분한 보컬과 에민 굴리예프의 스크리밍을 배치해 거리감을 형성하는 기법이 뇌리에 남고요.
톡톡 튀는 6번 트랙 'Working Class'는 장식을 줄인 기타 리프 대신 속도감과 날카로운 디스토션, 아제르바이잔 전통 현악기의 이국적인 비브라토가 감탄을 부릅니다. 현실적인 제목처럼 일상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투쟁적 하루를 연주하죠. 에민이 문화적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곡이기도 합니다.
7번 곡 'Togetherness'는 앨범의 감정적 중추격인 곡으로 재생시간이 가장 길죠. 함께 있으면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연대의 허상을 내건 제목은 레이어를 촘촘하게 쌓으며 멜로디를 통한 고조를 이룹니다. 대서사시적 구성에 맞춰 고요한 앰비언트 파트부터 모든 악기가 역동성을 터뜨리는 클라이맥스까지 선명하게 역할하며 음악적 해상도를 잃지 않습니다.
마지막 곡 'Life Dimensions'는 경계를 흐려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입니다. 사랑이 제국을 꾸린 이후 바뀐 삶의 관조를 남기며 다차원적 고찰을 유도한다고나 할까요? 이 세상이 사랑과 영혼으로 연결된 거대한 유기체임을 강조하죠. 오케스트레이션 요소를 가미한 페이드 아웃으로 결말을 지으며 무한하게 열린 제국을 향해 긴 잔향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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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dle 2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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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에디코 정금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