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각하는 직장인의 아침 출근길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자동차에 시동을 건 후 신호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죠. 더없이 평범한 이 동선에 이름조차 생소한 기업들이 줄곧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100세 시대는 이제 익히 들었던 일반명사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여전히 기업과는 거리가 먼 용어 같죠.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의 기업생멸행정통계를 보면, 2024년 잠정 기준으로 새로 문을 연 기업 가운데 5년을 넘겨 살아남는 비율은 36.4%에 그칩니다. 열 곳이 간판을 걸어도 5년 뒤까지 남는 건 서너 곳뿐이라는 얘기죠. 이 삭막하고도 척박한 환경에서 50년, 70년, 길게는 80년을 버틴 기업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가깝게 접하면서 이름은 한 번도 불러 준 적 없는 곳들이죠. 당신이 매일 기대는 이름들 우리를 위아래로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의 가느다란 강철 줄, 와이어로프를 만드는 대표 기업은 지난 1945년 부산에서 출발한 고려제강입니다. '키스와이어'라는 수출 브랜드로 세계 80여 개국에 판매하는데, 정작 국내에서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죠. 엘리베이터는 물론 현수교를 지탱하는 케이블, 자동차 타이어 속 강선까지 무언가를 매달고 버티는 곳이라면 대개 이 회사의 제품이 들어갑니다. 좁쌀보다 작은 부품 수백 개가 박힌 스마트폰에서 전류를 다스리는 콘덴서(MLCC)는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죠. 1956년 '오한실업'이라는 이름을 걸고 문을 연 삼화콘덴서가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종합 콘덴서 업체입니다. 자동차 한 대를 붙든 볼트와 너트는 1954년 자전거 부품을 만들던 '태양자전거기업사'가 그 시작입니다. 지금 사명은 태양금속공업으로 자전거 림에서 출발해 미국 GM에 아시아 업체로는 처음 납품할 만큼 자동차용 고장력 볼트 분야에서 국내 1위의 영향력을 뽐냅니다. 또 공사장에서 흔히 보는 굴착기와 들판의 풍력발전기. 이 거대한 몸체가 부드럽게 회전하는 비결은 선회베어링이라는 관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강릉의 신일정밀은 1976년부터 이 부품만 제작한 기업으로 올해 창립 50주년이라네요. 그런데 이 모든 쇳덩이는 누군가 먼저 쇠를 녹여야 만들어집니다. 쇳물을 담는 가마와 그릇, 즉 내화물을 만드는 곳이 1947년 태동한 '조선내화'죠. 철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1500도 이상의 불을 견디는 그릇은 이곳에서 만듭니다. 포스코의 쇳물 뒤에는 늘 이 회사가 있던 거죠.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데도 이름이 낯선 까닭은 소비자에게 물건을 직접 팔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기업을 상대하는 이른바 B2B 기업들이라 우리 눈에 띄는 광고를 할 일이 없는 거죠. 반세기 한 우물, 세월이 만든 무게 기계를 만드는 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금속제품은 결국 '공작기계'라는 기계가 깎아 만든 것으로 1952년 광주에서 시작한 화천기공이 이 분야 터줏대감입니다. 국내 제조 현장에서 돌아가는 공작기계 셋 중 하나가 이 회사 제품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기계를 만드는 기계의 명가인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무엇보다 밀접한 플라스틱은 햇빛과 열을 받아도 쉽게 바스러지지 않아야 하죠. 1965년 부산의 한 가정집에서 출발한 송원산업은 플라스틱이 삭는 것을 막아 주는 산화방지제를 만드는 업체로 이 분야 세계 시장 점유율 2위랍니다. 아울러 금속을 깎는 칼날을 만드는 코오로이(한국야금)는 1966년, 칼날 기술을 국산화하겠다는 포부로 시장에 등장했습니다. 냉난방·소방 등의 설비를 설계하는 업체인 하이멕은 같은 해 '한일기술연구소'로 문을 연 후 2024년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죠. 우리에게 장수 업체들의 이름이 낯선 건 하이멕처럼 한두 번씩 이름을 바꾼 이유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50년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입니다. 베어링 하나, 볼트 하나를 수십 년 깎다 보면 후발주자가 따라잡기 어려운 기술이 쌓이고 결국 우리가 타는 자동차와 손에 쥔 스마트폰, 올라선 건물의 토대가 되는 거죠. 게다가 이들은 그저 오래 버틴 회사가 아니라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출발해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코로나까지 숱한 고비를 다 통과하고도 살아남은 불굴의 전사들입니다. 신생 기업 열 곳 중 예닐곱은 5년을 못 넘기는 나라에서, 반세기를 견딘 자체가 곧 실력의 증거이고요. 이들에겐 화려한 간판도, 익숙한 광고 음악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기업들이 하루만 멈춰도 우리의 평범한 아침은 꽤 많은 곳에서 삐걱댈 테죠.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오래 버틴 이름들. 이제 한 번쯤 기억하고 부를 때가 됐습니다. /이슈에디코 강민호 기자/